2019년 5월 소식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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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9.09.16 | 작성자 : 운영자 | 조회 : 1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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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터 회원님들 안녕하셨어요. 이번 5월 12일은 ‘석가 탄신일’ 부처님오신날이 있는 달입니다. 사랑터 사무실에서 1km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성북동의 길상사를 소개 하겠습니다. 길상사는 본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김영한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요정운영으로 큰 돈을벌었습니다. 그러던 중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요정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은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처음 사찰이 되었다가,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 하였습니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1000억 원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시주를 받은 데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이 신나서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그녀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니 이를 비난하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김영한이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세상을 떠난 뒤에 화장하여 절터에 뿌려졌습니다. 절터에 골고루 산골 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고,. 2010년 법정도 여기서 입적했습니다.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이 있고, 진영각에는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잠을 주무신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법회가 끝나면 본인이 기거하시던 암자로 바로 가셨다고 합니다.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시신으로 하룻밤을 길상사에서 주무시고 다비식 장소로 가셨습니다.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은 법정이 종교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최종태 에게 의뢰하여 봉안하였습니다. 사찰의 설립식 행사 때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절을 방문해 축사를 한 적이 있고, 법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천주교 명동성당을 방문해 답사했습니다. 관세음보살상이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분위기로, 나이 지긋한 불자들은 좀 낯설어 보이기도 하겠지요? 최종태씨는 길상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종로구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도 조각했는데, 이 성모상과 관세음보살상은 마치 친자매처럼 매우 닮았습니다. 길상사를 이야기를 하면서 법정스님 소개를 안 할 수 없습니다. 법정은 스님이며 수필가입니다. 무소유외에도 여러 저서로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어느 날 갑자기 강원도 어딘가로 이사를 가버리곤 법회 때나 가끔 산을 내려 오셨다고 합니다. 상당한 인세를 유럽이나 인도 여행을 다니는데 사용한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사실무근 이고, 유럽의 경우 프랑스 파리에 송광사 분원이 있어 법문을 위해 갔다 오는 것으로 여비는 종단에서 대주었고, 인도의 경우 기행기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일보에서 대줬습니다. 정작 인세는 모두 장학금이나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하셔서 자신의 병원비를 댈 돈이 없어,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던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법정의 임종직전 밀린 치료비 수천만원을 대납했습니다. "이 몸뚱이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 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 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입적 전날에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입적하셨습니다. 자신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고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자신에게 신문을 배달하던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법정의 유지가 공개되었습니다. 만장과 꽃상여 하나 없이 자신이 입던 가사 한 장을 덮고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조촐한 모습으로 다비장으로 가셨습니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신뒤 자신의 저서 ‘무소유, 아름다운 마무리, 혼자사는 즐거움, 숨결, 버리고 떠나기,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편지, 마음의 온도 등’ 많은 책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셔서, 법정스님의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서점들이 한동안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사랑터 회원님들 봉사활동 하는 날 성북동 아리랑 고개를 넘어오면서 길상사가 있습니다. 잠시 길을 멈추시고 길상사에 들려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차 한잔의 여유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터 이 명 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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