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 2021년 12월 소식지 *
날짜 : 2022.04.18 작성자 : 전희자   |   조회 : 710
2021년 사랑터 12월활동.pdf
사랑터 회원,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2021년 12월이 되었습니다. 금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지인들끼리 만나 정을 나 없고, 여행을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며, 마스크를 써서 말하기도 불편한 가운데 한해가 흘러갔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다 보니 음식점 등 많은 자영업자들이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여행업과 항공 공연 등 산업 전반에 불경기를 넘어 폐업하는 사례가 많이 있어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이러한 어려운 가운데 기부를 실행하는 ‘어머니의 기부’하는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MBC라디오 양희은과 서경석이 진행하는 여성시대에 소개된 글입니다.

‘어머니의 기부’ 엄희소님 글
어머니는 이삿짐을 싸면서 내내 말이 없었다. 이삿짐을 쌀 때는 이사 갈 집에 대한 설렘으로 들뜨기 마련인데 우리들은 담담하게 어머니를 도와드렸다.
삼심여년을 살던 집과 정들었던 서울을 떠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느이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아마 서운해 하셨을 거야” 한참 후에 어머니는 25년 전에 눈을 감으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집을 판 것 중에 얼마를 암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가신게 늘 마음에 걸렸다는 어머니의 눈길이 촉촉해졌다. 30년 동안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잠실 시영아파트 13평에 방두 개와 좁은 거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던 주방과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 화장실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삼심여년 살던 어머니가 다음 날이면 떠나야 했다. 우리 형제 다섯이 잠잘 때도 꼭 붙어자야했고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저녁에 씻으때도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던 곳, 너무나 많은 부모님의 눈물과 땀이, 우리 오 남매의 따뜻한 정이 배여 있는 아파트를 남기고 가야했다. 아버지는 평생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셨다. 같이 일하는 분 중에 체구가 가장 작았지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밤이면 뼈마디가 질러냐는 신음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 곤했다. 그러나 자식을 앞에서는 언제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오 남매를 위해 당신 얼굴에 주름을 만들었고 몸은 후두암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형편이 여의치 못해 치료다움 치료도 못 받고 사십대 후반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자식들을 다 가르치지 못해 미안하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셨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 하셨다. 함바집, 가죽공장, 과수원 품팔이, 식당 등등, 새 옷 한번 못 입어 본 우리는 학용품은 대물림을 하고, 먹는 것도 부실했고 어머니의 주머니도 텅텅 비는 날이 더 많았다. 어머니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월급을 더 많이 준다는 곳을 알았다. 그러다 들어가게 된 곳이 여관이었다. 종일 여관에서 방청소와 빨래를 하고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들어왔다. 어떤 날은 밤근무도 하고 남들보다 수당을 더 받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일하셨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해서 몸은 고달퍼 보여도 어머니의 표정은 항상 밝았다. 어머니가 안쓰러워 일을 그만두라고 해도 가르쳐야 할 자식이 있다며 그만두지 않았다. 큰 오빠와 언니들이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는 언니 오빠가 있어도 어머니는 막내가 졸업한 뒤 오년을 더 다녔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연세도 칠십이 넘었다 오 남매도 저마다 짝을 찾아 떠나고 아파트에는 유난히 작은 체구의 어머니 혼자 계시기엔 넓어 보였다. 차츰 주위에는 키 자랑을 하듯 고층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그러나 재개발 결정이 나면서 너도나도 아파트를 팔았다. 집을 팔아보았자 새로 짖는 아파트를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떠났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을 지켜온 둥지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아직도 아버지의 숨결이, 어린 자식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며 같이 살자는 아들을 뿌리쳤다. 그렇게 고집을 피우던 어머니가 마음을 바꾼 것은 늘어나는 빈집 때문이었다.

결국 어머니도 이사를 가기로 했다. 매매계약을 하던 날 어머니는 난생처음 큰돈을 만져본다며 웃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웃음 뒤 쓸쓸함을 보았다. 허탈한 마음을 감추려고 짐짓 크게 웃으시는 공허함이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짐정리가 다 된 듯 어머니는 거실로 우리들을 불렀다. 작은 손가방에서 여러 개의 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오 남매에게 한 씩 나누어 주었다. 의아해서 열어보니 봉투 속에는 수표 한 장씩이 들어있었다, 동그라미 일곱 개가 있는 큰 액수였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머니를 보니 빙그레 웃으며 “그게 얼마 안되지만 똑같이 넣었다”하셨다. 그 돈은 아파트를 팔고 받은 거였다. 어머니는 형편이 좋건 나쁘건 우리 오남매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셨다.

“어머니, 이건 어머니가 쓰셔야지 왜 저희를 주세요. 저희는 이렇게 큰돈 없어도 돼요”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말했더니 “늙은이가 돈이 많으면 뭐해, 그냥 조금씩 넣었고, 내 통장에도 많이 있으니까 걱정들 말어” 정색을 하고 집을 판 것 중에 얼마를 암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가신게 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삼십년을 한집에 살면서 이만큼 복을 받았으니 조금은 되돌려주고 가야지“
어머니는 여관일 등을 하며 막내까지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집터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또한 당신이 어디 가서 그런 벌이를 하고 어떻게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었겠느냐고 하셨다. 당신 생전에 이런 큰돈을 만지게 된 것도 집터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어머니, 그러니 갈 때는 조금이라도 되돌려 주고 싶다고 했다. 암 치료 센터에 얼마를 기부하겠다고 하셨다. 정작 당신이 이사 갈 곳은 작은 단칸방이었다. 그리고 평생 사치를 모르고 허름한 차림으로 사신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화분에 물주는 것을 깜빡 잊었다며 좁은 베란다로 나갔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정성들여 가꿔온 국화 화분이 십여 개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중에 두 개 정도만 갖고 가고 나머지는 놓고 가겠다고 했다. 누군가 노란 국화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갖고 가길 바란다. 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이 애써 가꾸어온 화분에 물을 주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끝

잠실의 작은 시영아파트에 5남매가 성장하는 모습과 가족부양에 고생 많이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우애있게 지내는 가족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큰 욕심 없이 고생하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남편을 생각하시며 암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새로운 집에 이사 가셔서도 건강하시고 자식들과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길 기원 드립니다. 누구든 넉넉하고 부유해서 기부를 하겠습니까? 어려운 경기로 힘든 가운데 기부해 주시는 사랑터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마음들은 도움을 필요로하는 곳에 잘 사용하겠습니다.

사 랑 터  이 명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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