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소식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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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4.06.11 | 작성자 : 최고관리자 | 조회 : 2833 |
사랑터 14주년의 해 2001년 6월 (사랑터 의 노인위안 잔치에서 흥겨워 하시는 노인분들) 사랑터는 어두운 곳에 사랑의 횃불을 밝히며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단체입니다. ● 발행일 : 2001년 6월 1일 ● 편집인 : 사랑터 사무국 (송이현) ● 연락처 : (02)3675-2021 ● 2001년 6월 통권 55호 ● 발행인 : 이 명 우 ●발행처 : 사회봉사단체 사랑터 ● 주 소 :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2가 4번지 아남아파트 102동 1702호 사랑터 인사 사랑터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년 같으면 모내기를 끝낸 논에 모가 푸르게 자라는 모습이 싱그러울 터인데 금년은 심한 가뭄으로 아직 모내기도 못하고 밭작물은 다 타들어 가며 농사를 포기해야겠다는 농민들의 한 숨 쉬는 소리가 넘쳐 납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창고에 식량이 가득해야 인정이 넘치는데 경제 위기솎에 심한 가뭄이 인심 까지 흉흉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말라 버린 하천바닥에 뜨거운 햍볓이 작열해, 불이 붙을 것 같지만 앞으로 한꺼번에 비가 쏟아져 큰 피해를 입힐까봐 또한 걱정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연을 슬기롭게 다스리고 이용해야 되는데 물의 귀함을 모르고 자만하였고 집단이기주의로 댐을 만들어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슬기를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현실은 그러지 못했던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온 국민이 바라는 비가 충분히 내려서 불타는 대지를 적셔 주고 농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게 되길 기원하며, 앞으로는 물의 소중함을 알아 절약하고 아껴쓰며 환경을 사랑하는 자세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회원 여러분 가족모두 건강관리 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터 회장 이 명 우 5월 정기봉사 모임 2001년 5월 정기봉사 모임일인 5월 19일에 이명우, 이순식, 문치권, 박정자, 성정해, 송이현, 윤효숙, 윤광혁, 조공자, 오한순, 강성재, 정근종, 오신분, 정규선, 조진수, 이은순, 유혁연, 이필택, 방희대 회원님이 참석하셨습니다. ♤ 홍법사 : 이명우, 박정자, 윤효숙, 성정해, 문치권, 윤광혁, 정규선, 송이현, 이필택, 방희대 회원님 ♤ 라파엘의집 : 이명우, 윤효숙, 정규선, 이필택, 박정자, 방희대, 성정해회원 ♤ 잔디네 집 : 이명우, 정규선, 윤효숙, 성정해, 방희대, 박정자 회원 방문 ♤ 성가복지병원 : 조공자, 오한순, 강정재 ♤ 백혈병어린이 재단 : 유혁연, 성정해, 정규선 ♤ 우리집 공동체 : 이순식 ♤ 작은자리 : 문치권, 윤광혁, 송이현 ♤ 한우리 장애인 마을 : 조진수, 이은순 ♤ 무의탁노인 홍익표 : 조진수, 이은순 ♤ 노원구의 장애가정인 노양균, 정태준 집과 소녀가장 배선진양집을 유혁연 ♡ 후원물품 구매및 분류 포장 : 정근종, 오신분님이 하셨습니다. 각 방향별로 시설 방문을 마친 회원님들이 홍법사에 모여 심향 스님이 마련 해 주신 사찰음식으로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 5월 3일 예닮마을, 시온 찬양의 집 : 이명우, 조일현, 문치권, 정성안, 김현숙 회원님이 방문하셨고 ♣ 5월 7일 사랑의 집과 무의탁노인 이신 박겸자, 신현순, 조기창, 강상숙 김상철할아버지 댁과 모자가정 세대인 유방우씨댁을 이명우, 조일현, 문치권, 정성안, 김현숙 회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무의탁노인댁에서 준비해간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면서 자식없이 외롭게 생활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 드렸습니다. ♣ 5월 7일 자식이 없어 병든몸으로 시설에서 외롭게 생활 하시는 마이러 하우스를 방문하여 이시설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들께 어버이 날을 앞두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마음을 위로해 드렸는데 눈물을 글썽글썽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 아팟습니다. ♣ 5월 8일 어버이날 병든몸으로 도루가 선교회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들을 방문하여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함께 방문한 아가씨 회원들이 할머니 들께 안마를 해드리고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창경궁 과 자매결연 5 년전부터 사랑터에서 중,고등하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해오던 창경궁과 5월 12일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우리문화 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을 가르키기 위하여 창경궁과 종묘를 대상으로 자원봉사와 교육을 시켜오던 활동으로, 자원봉사 참가 학생들에게 매번 잡초 뽑기와 쓰레기 수거등의 봉사활동을 시키는 것으로는 교육적 효과가 없어 사랑터 회원들이 직접 고궁의 역사와 건축양식에 대해 공부를 해서 교육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아 고심을 해오다, 고궁을 안내해주는 봉사모임인 우리 궁궐지킴이 회원들과 협의를 통해 청소년 들에게 30 - 40분 정도 교육을 시키고 난뒤에 잡초뽑기등의 교육을 시켜오고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사랑터의 자원봉사 활동을 책자에 수록 각 중,고등학교에 배포하여 홍보해 주고 있습니다. 결 연 패 봉사단체 사 랑 터 창 경 궁 관 리 소 두기관은 우리 문화 유적인 창경궁을 아끼고 보호하며 정성을 들여 관리 할 수 있도록 청소년 자원봉사활동을 활성화 하고 청소년 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을 교육 시키기 위해 결연을 맺습니다. 2001년 5월 12일 창 경 궁 관 리소 소장 김 갑 륭 봉사단체 사랑터 회장 이 명 우 5월 12일 (토요일) 창경궁 자원봉사활동이 끝난뒤 창경궁 관리소 측 공무원15명과 사랑터 회원 명이 참석하여 자매 결연패를 교환하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청소년 자원봉사 활동의 활성화에 대해 토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석 회원 : 이명우, 송이현, 김석진, 조일현, 문치권, 윤광혁, 한효섭, 전연순, 김복임, 이주식, 김용섭, 장윤석, 이순식, 조공자, 오한순, 강성재, 겅규선, 현경채, 노학순, 손화준, 윤효숙, ♡ “장애인들의 발이되어 주는 아름다운 손” 이 세상의 단 한사람을 위해 구두를 짓는 고집스런 구두장이의 장인정신이 양발을 땅에 딛고 걸을 수 없었던 장애인들에게 새 인생을 선물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죽과 줄자, 고무와 깔창을 손에서 놓아본 일이없는 예순세살의 구두공 “남궁 정부”씨, 수천개의 특이한 발을 위해 그 숫자대로 새로운 본을 뜨고 직접 손으로 구두를 제작해온 그는 오른팔을 잃은1급 장애인이지만 구두업계의 진정한 장인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단 한번도 구두를 단순한 신발의 의미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남궁정부 씨는 ‘구두는 신체의 일부며 장애인들이 땅을 디딜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 짓는 소중한 물건’이라는 생각으로 구두를 만들어 왔다고 한다. “오른팔을 잃고 장애자에 눈돌려” 강동구 천호동에 자리한 야트막한 건물, 이곳에 들어서면 흡사 정형외과에 온것처럼 질병이나 화상등으로 심하게 변형된 발을 찍은 사진들과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바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장애인 구두 연구소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남궁 정부씨가 구두를 만드는 갖바치의 길에 들어선자는 벌써 50년전, 열두살때부터 가죽을 다루고 신발을 만들어 온 그가 장애인용 구두를 만들게된 계기는 안타깝게도 자신에게 찾아온 장애 때문이었다. 지난 95년 하루일을 마친 밤11시 퇴근길, 그는 지하철역에서 운명적인 순간을 만났다. 지하철역에서 내리다 술 기운으로 발을 헛디디면서 오른쪽 팔을 잃고 만것이다. 호구지책 이라고는 구두만드는 기술이 전부였던 그는 순간 답답한 심정에 불구가 될운명이었다면 차라리 다리를 잃게 하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고로 그의 인생은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어깨 봉합수술을 무사히 치른 그는 완치후 의수를 맞추기위해 평소 잘알고 지내던 의수, 의족 상점을 들렸는데 그곳 주인은 그에게 ‘장애인 신발을 구하기 힘들다’며 그동안 닦아온 구두기술로 장애인 구두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 하더라는것, 예전에 신발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자신은 팔이 불편한데 정작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쇠막대기가 달린 장애인용 신발이었다. 그곳에서 의수나 의족을 하러온 사람을 만나도 먼저 발을 쳐다보게 되고 동시에 저사람에게는 신발 뒷발굽만 높여주면 편히 걸을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으로는 신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들만을 위한 신발을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을 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지요. 장애를 경험 한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고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보니 그 아픔이 얼마나 클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애인용 구두 만들기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 먹었죠. 그러나 장애인 구두 제작은 국내에서는 미개척 분야였기 때문에 50년을 구두 제작에 전념한 그에게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국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지고, 재활의학과를 쫒아다니며 자료를 구했지만 도저히 해독할 수 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그는 미국과 유럽의 책을 어렵시리 구했지만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결국 공군 조종사인 아들이 발벗고 나서서 번역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병원을 수시로 다니면서 그는 자문을 구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드디어 비정상적인 발을 위한 구두를 만드는 훈련을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왼손 하나만으로 구두를 만든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스테플러와 압정은 재단지와 구두가죽을 고정 시키는 오른팔의 역활로 사용했고, 왼손으로는 징을 박고 접착제를 붙이면서 장애인용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발이라도 그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으면 제대로 걸을 수 있는데, 그런 신발을 만드는 데가 없었나봐요. 한 번은 어린소년이 목발을 짚고 절 찾아 왔어요. 차근차근 발 모양을 들여다본뒤 족문을 찍고 석고를 떠서 발형을 만들었습니다. 특수제작한 발틀에 고무를 대보기도 하고 밑창의 높이를 더했다 뺐다 하면서 밤새도록 구두를 만들었죠. 밑기지 않겠지만 그소년이 제가 만든 신발을 신더니 목발없이 성큼성큼 걷더군요. 그후 그가 특히 신경을 쓰는 건 장애인용 신발을 만드는 일이다. 아동들은 아직 교정할 가능성이 있는 단계이므로 교정치료용 신발을 신으면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신겨주 사람” 구두를 만들면서 장애인 한사람 한사람의 발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다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남궁정부씨 이제 그가 만든 구두를 신는 장애인은 단골만도 수백명에 이른다. 한번 맞춰간 구두라도 발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 언제든지 새로 맞춰주고 몇년 지난 신발도 헤진곳이 있으면 새것처럼 수선을 해주고 있으니 처음 온 손님이라도 단골이 되기 마련이다. “돈 벌려고 시작한 장사가 아니기 때문이죠” 유럽에서는 장애인구두도 의료보험이 된다는데 우린 그게 안되잖아요. 부담이 적게 재료도 국산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죽빼고 안창이나 밑창 재료는 수입품을 쓸수밖에 없습니다.. 비싸게 산 구두를 한번신고 그냥 버리면 정말 아깝잖아요, 오래 신을 수 있도록 해진 부분은 지속적으로 손질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장애인 수에 비해 특수 신발을 제작하는 곳이 많지 않아서 어느 정도 수익이 날듯도 싶은데 재료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그에게는 별반 수익이 없다. 오히려 손해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들 대부분은 넉넉치 못해요. 그 사실을 알면서 돈을 다 받을 수 있나요. 그냥 주는대로 받을 때도 있어요.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에게는 무료로 구두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요. 그가 버는 돈은 당연히 용돈과 세금정도. 그래서 생활비는 언제나 가족들의 몫이다. 아버지의 좋은 일을 곁에서 제일 큰 박수로 후원하는 든든한 식구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장애구두 연구소는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내 것보다 남을 아껴주고 싶은 살뜰한 마음으로 살아온 그는 얼마전 또 한번 좋은 일을 했다. 강동 구청에서 한달에 한번 치르는 무료 결혼식 행사에 신랑신부용 신발을 무료로 맞추어 준것. 남궁정부씨가 신문에 조그맣게 난 ‘무료 결혼할 신랑신부를 찾습니다. 라는 기사를 보고 제발로 나섰다. 어려운 살림에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았을 네 쌍의 신랑신부에게 새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왼팔 하나만 가지고도 걸음이 불편한 장애인의 또 다른 발을 만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 남궁정부씨 장애인 들에게 ‘희망의 비상구’가 되고 싶다는 그는 오늘도 사랑의 신발을 정성들여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사랑을 실천 하시는 많은 분들의 희생과 정성에 의해서 우리 삶의 가치가 더 풍부해지고 인간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것입니다. ☞ 은혜의 삶 강철왕이라 불리는 카네기는 영국에서 사업이 너무 어려워져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온 식구 들과 같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여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친구이신 핸더슨 부인이 선뜻 이십파운드를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낯선 땅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준것이다. “고맙습니다. 빌려간 돈은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거듭 약속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카네기 가족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루에 꼭 50센트씩 핸더슨부인의 돈을 갚기 위하여 저축을 했습니다. 마침내 어렵게 모아둔 돈이 이십파운드와 맞먹는 돈이 되었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서로모여 축하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카네기는 ‘빚을 갚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평생 고마움을 간직하고 삽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 친구들, 동료들로부터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만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요, 선하고 착한일에 동참하며 경건하게 사는 길입니다. ※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직접 은혜를 주신 분에게 빚을 갚듯이 돌려 드릴 수 는 없지만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게 사랑으로 되돌려 드릴 수는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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