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019년 8월 소식지입니다
날짜 : 2019.10.22 작성자 : 운영자   |   조회 :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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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터 회원님들 8월의 무더위 이겨 내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에어컨을 너무 많이 틀다 보면 냉방병으로 건강을 해칠 수가 있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터 사무실 주변 가볼만한 명소 등을 6월 까지 소개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낙산 넘어 동대문부근 청룡사 주변의 단종애사와 관련된 명소를 소개하겠습니다.
1452년 조선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한지 2년째 되던 해인 1454년 정순왕후 송 씨를 왕비로 맞이합니다. 왕비의 나이는 15세였습니다. 숙부인 수양대군이 호시탐탐 조카의 보위를 노리고 있었으니 단종의 미래는 슬픔으로 드리워집니다.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에 단종은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정순왕후는 사정전을 나와 수강궁에 머물게 됩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고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됩니다. 다시 숙부인 금성대군이 경상도의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 사망하자 노산군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서인 (庶人) 으로 추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대비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린 정순왕후도 더 이상 수강궁에 머물 신세가 못 되어 궁 밖으로 나오면서 숭인동 청룡사 주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1158년 고려 의종때 희종법사가 창건한 숭인동 청룡사에는 우화루(雨花樓) 란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밤을 지새웠던 곳입니다. 여기서 둘의 이별을 앞두고 빗물처럼 쏟아지던 눈물을 꽃비에 비유하여 지어진 명칭으로 애절하기 그지없습니다. 단종과 이별하고 정순왕후 송 씨는 청룡사 정문 옆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이름을 정업원 (淨業院) 이라 짓고 시녀 3명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한가한 때면 정순왕후와 세 시녀가 함께 두던 ‘고두놀이판’ 이 새겨진 바위가 1960년대 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도시 개발의
물결 속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어째든 세조는 자기의 질부인 정순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 주려 하였지만 남편이 유배된 영월과 좀 더 가까운 동대문 밖에 살기를 원했답니다.


정순왕후가 죽고 250년이 지난 뒤 영조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정순왕후가 살았던 이곳에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정업원이 있던 옛터) 라고 다섯 자를 어필로 써서 비석을 세워주었고, 또 동쪽을 바라보던 봉우리라 하여 동망봉(東望峯)이라고 세 글자를 정업원 맞은 편 산봉우리에 새기게 하였습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매일 같이 올라가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던 곳이라 는 뜻입니다. 정업원구기 의 현판 역시 영조의 어필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어필이 새겨진 비석과 동망봉 바위는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가 채석장이 되면서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 씨는 열다섯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 단종을 잃고 그것도 왕비의 신분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 한 채 죽을 때 까지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 된 것입니다.

또 동묘에 가면 그 옆에 위치한 숭신초등학교 담장에 (여인시장) 터임을 알리는 묘석이 있습니다. 이곳은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채소시장을 열었던 곳 이라고 합니다.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던 정순왕후에게 푸성귀 같은 먹을거리라도 전하기 위해 동네 여인들이 시장을 만든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장터가 지금은 주로 노인들이 찾는 ‘동묘벼룩시장’ 으로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힘겨운 생계를 이어가면서 살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단종의 묘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안타깝게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 못했습니다. 정순왕후의 무덤은 단종의 무덤과 멀리 떨어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동 사릉(思陵)에 있습니다. 사릉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아름다운 소나무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사릉의 소나무는 강원도 영월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고 합니다. 사릉의 굽은 소나무를 보면 높은 절개와 그리움이 느껴집니다.

영도교 : 동대문옆 영도교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을 갈 때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이별한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을 하였다고 하여 영이별다리, 영영 건너 다리라고 불렀던 다리를 그 뒤 성종이 나무다리를 헐고 돌다리를 신축한 다음 친히 영도교 라고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새기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다리는 흥선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 때 석재로 쓰여 사라지고 일부 돌만 남아 뛰엄뛰엄 징검다리처럼 있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변화 되었지만 이마져도 청계천 고가 공사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가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 때 다시 새롭게 만들어져 지금의 영도교입니다. 낙산공원 정상 마을버스 정거장에서 동쪽으로 차도를 따라 약 450m 쯤 가면 우측에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습니다. 이곳은 광해군 6년(1641년) 지붕 이수광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붕유설을 지필한 장소로 알려진 ‘비우당’을 복원해 놓은 것 입니다. 비우당은 본래 조선 초 세종 때 유관이라는 정승이 살았던 오두막집 우산각 (雨山閣)이 있던 자리입니다. 유관은 태조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총 35년간 정승을 지냈지만 울타리도 없는 작은 오두막집에 살았는데 워낙 허름해서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후 선조 때 유관의 4대 외손 되는 판서 이희겸이 유관의 높은 뜻을 기려 이 집에서 살았으며 집을 조금 넓혔습니다. 이처럼 이희겸 역시 청빈하게 살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폐허가 된 이 터에 이희겸의 아들 이수광이 다시 집을 고쳐 살았는데 이때 그는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 이란 의미로 (비우당) 이라고 집의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수광의 비우당 뒤에 정순왕후 송씨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염색한 옷을 말렸다는 (자주동샘)이 있듯이 정순왕후 송 씨의 흔적을 따라가는 역사기행 코스도 개발되어있습니다.

사랑터 사무실 가까운 곳에 이조 단종 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랑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시간되실 때 한번 역사기행을 해보십시오.


사랑터   이   명   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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